인생 첫 차를 버리면서, 그리고 두 번째 차

 




인생 첫 차를 드디어 버리게 됐다. 첫 주인은 2012년에 이 차를 샀다가 중고차매장에 넘겼고 나는 이것을 2014년에 구입해 8년을 타고다녔다.

새차는 못 타도 똥차는 안 탄다고 엄청 관리를 열심히 해서 어디 긁을 때마다 자비로 수리하고 엔진도 하부도 매우 신경써서 출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한데 아주 가끔 스피커에 음악이 안 날 때가 있다. 여느 때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텐데 왠지 며칠 전은 에라 차 바꿔야겠다 괜히 그런 생각이 들어서 바로 질렀다.

그렇게 애지중지 타고다니던 차였지만 폐차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0년된 국산 준중형 차는 상품 가치가 없단다. 아니 이렇게 멀쩡한 차가 상품 가치가 없다니. 소리도 조용하고 주행감도 이렇게 멀쩡한데? 근데 뭐 나도 안 타니까 할 말이 없다. 10년된 차는 매물이 많다고 한다. 다들 10년 쯤 되면 나처럼 바꾸나보다.

70만원에 팔린다는데 폐차하면 50만원을 준단다. 70만원에 사가는 사람도 나중에 폐차 비용 50을 챙길 테니, 실질적으로는 20만원에 사는 셈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차라는 물건은 공짜나 다름없는 것이다. 유지비만 좀 들어갈 뿐. 차나 집이나 관리하고 깨끗히 쓰려니까 돈이 들어가지 그냥 버리려면 돈도 안 든다.


처음 차를 살 때는 중고차 매장에서 경차를 사려다가 당시로서는 조금 무리해서 준중형을 산 건데, 정말 그러길 잘했다. 경차였으면 회사 업무를 나갈 때도 그렇고 데이트를 할 때도 그렇고 조금 서운했을 것이다. 별로 좋은 차도 아니지만 이거 타고 다니면서 자신감을 잃은 적은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는 자존감이 생기기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환경과 물질의 지배를 받는다 .이 차 한대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래도 내 인생에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올려놓은 사진을 보고 있으니까.. 역시 옛날 추억이 떠오른다. 졸음 운전으로 고꾸라졌던 생각도 나고. 빗길에서 한바퀴 반 돌았던 생각도 나고. 그러나 역시 .. 뭐.. 옆자리에  태웠던 여자 생각이 나네. 많이는 못 태웠어도, 그래도 앉혀 놓고 잼있게 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근데.. 솔직히 다 잊어버리고 별로 생각도 안 난다. 나의 30대, 그 추억을 함께한 차가 버려지면서 기억도 같이 멀어져간다.



두 번째 차는 예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렉서스 CT200h 이다. 나는 차에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바꾼다면 이런 차 사고 싶다고 이따금 생각했던 게 CT라서.. 근데 단종됐네? 중고 매물 올라온 거 바로 질렀다. 운전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서 큰 차는 절대 사양이고 작은 차 중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차를 내 나름 골라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척이나 기뻐야 하는데, 차만 있어도 행복한 시절은 지나서인지 신나는 마음보다는 걱정이 많다. 집 사는 데 보탰어야 할 금액을 또 메우려니까  그렇고. 이제는 이 정도 차 샀다고 뽐내고 자랑할 처지도 아니고.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외제차를 사보나, 나이들면 더 못 살 텐데, 그런 생각이 드니까 비싼 건 아니라도 이 정도는 질러보자 싶더라.


나이가 들 수록 뭘 해도 행복하지가 않다. 행복은 저축이 안 된다. 그 시절에 느낄 행복은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다. 지금 행복한 것도 지금 뿐이니, 현재에 감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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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잘 해요? 멈춰! - 자살과 집단괴롭힘에 대하여

 가끔 마포대교에 설치됐었던 자살 방지 문구가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수영 잘 해요?'




이 문구가 상대를 조롱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는 나쁘지 않다. 우선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물에 빠지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에 빠지면 춥고 물먹고 고생이 많다. '수영 잘 해요?' 문구는 이런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도발을 당해서 욱 하는 심정이 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살 생각을 잊게 만들 수 있다.

'뛰어봐 ㅋ 쫄보새끼'

'헬조선 경쟁자 제거www'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런 문구들도 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도발하기 위한 것들이다.


사실 그 밖의 문구들도 그냥 문장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바로 뛰어내리지 않고 뭐라도 생각할 수 있게끔 시간을 주는 것이다. 


나도 10대 20대때는 수도 없이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서른 살 즈음에야 자살 생각을 덜 하기 시작했다. 짧게 봐도 그렇고 길게 봐도 그렇고 자살을 막는 것은 역시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바쁘게. 20대 시절에 우울증에서 벗어난 기간이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군대에 있을 때였고, 한 번은 동아리 회장으로 있던 때였다. 그 둘의 공통점은 바쁘게 할 일이 많다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너무 정신없고 바쁘니까 내가 바깥에서 왜 슬퍼했는지, 뭐가 문제였는지 잊게 되더라. 그리고 바쁘게 인생 살다 보니까 그냥 다 잊어버리게 되더라.


어쩌면 멍청해진 것일 지도 모르겠다. 자살 생각과 더불어서 감정도 메마르고 실제로 머리도 나빠졌다. 예전에는 술술 쓰던 시나 글도 지금은 잘 쓸 수 없다. 어렸을 때는 작곡을 잘 했었는데 이젠 그것도 못 하게 됐다. 말도 많이 느려지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우울증에 걸리면 뇌가 가진 사고력의 반절을 잃게 된다는데, 우리의 뇌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치유하나보다.


이것 말고 자살을 막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종교이다. 10대와 20대를 종교적 사명으로 죽지 않고 억지로 살았다.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 표본이 예수그리스도이고, 그래서 예수 따라서 산다고 하여튼 살았다. 살다 보니 살아남았다. 또한 돌이켜보면 그 때 옆에서 같이 교회다니던 친구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나를 돌봐주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나처럼 질척거리고 더러운 영혼과 말을 섞고 투정을 받아주고 감싸 안아줬던 것은 분명 종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종교의 위대함은 no cost에서 나온다. 아무런 댓가 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살에 대해서 뭘 알기나 하고 자살 예방 문구를 조롱하는 것일까? 자살하려는 사람을 단 1주일이라도 끈질기게 설득을 해본 적이 있을까? 자살을 막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지도 못하지. 우울과 상실의 깊이가 어떤 건지 모르지, 알 리가 없지.



한 가지 더 조롱받는 것이 있다.

'멈춰!'

주변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을 때, 다같이 이렇게 외치라는 것이다.

방법이 우스꽝스러운 걸까? 아니면 그런 걸 누가 하느냐고 실효성을 말하는 것일까? 실효성은 없을 수 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왜 아무도 그렇게 안 하느냐고 따져야 옳다. 방법이 잘못되진 않았다.

내가 괴롭힘을 당할 때, 반에는 세 가지 종류만 있었다. 나, 날 괴롭히는 사람, 그리고 나 괴롭힘 당하는 걸 구경하는 사람. 실제로 괴롭힘을 당할 때, 누군가 멈춰! 했더라면.. 아니면 그거 그러지 말라고 내 편을 조금이라도 들어줬다면, 괴롭힘이 아예 멈추진 않았을지라도 나는 마음의 상처를 덜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괴롭힘 당할 때 가장 큰 문제는 괴롭힘 그 자체가 아니라 세상 천지에 내 편이 없다는 것이다.


딱 한 명 기억나는 친구가 있다. 이진혁, 깜바. 내가 기억한다. 늘 그랬던 건 아니지만 내가 괴롭힘 당할 때 한 번인가 야 야 그만 좀 해라~ 한 마디 해준 거. 평생 고마워한다. 얼마나 든든했던가.

사실은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내 친구 손명수가 옆반 애한테 멱살이 쥐어지고 협박을 당하는데, 나는 그냥 보고만 있다가 나중에 명수야 괜찮다 라며 위로를 해줬다. 지금의 나라면 바로 주먹을 날려서 옆반 새끼를 단 한 대라도 쥐어박았을 텐데. 그렇게 했어야 했다. 왜 나는 비겁하게 구경만 했을까. 그 때는 너무 몰랐어, 사람은 때리면 안 되는 줄 알았어. 절대 다른 사람은 안 때린다고.


용기를 낸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지혜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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