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컬레이터 대신 건널목 - 영동역 공사중에

  충북 영동군에 있는 영동역이 공사에 들어갔다. 원래 엘리베이터와 계단만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댄다.

  하여튼 그래서 계단이고 엘리베이터고 뭐고 다 이용할 수 없어서 임시로 건널목을 건너고 있다.





여기까지 오전에 찍은 거



또 여기까지 오후 사진.

  건널목이 있으니까 그냥 편하다. 오르락 내리락 할 필요도 없고 평지로 걸어서 건너가면 된다. 왜 굳이 다리 아프게 지하로 내려갔다 올라올까? 그냥 요렇게 건너가면 되는걸!

  안전을 위해서 차단기도 설치되어 있고, 또 사람이 지키고 서 있다. 고용창출? 그렇다. 에스컬레이터 설치할 돈으로 사람 고용해서 건널목 계속 쓰면 어떨까 싶다.

  에스컬레이터 완공 안 됐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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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Cam HD-3000 - 마이크를 샀더니 카메라가 덤으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만 만드는 게 아니라 잡다한 컴퓨터 주변기기도 만든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우스와 웹캠. 마소 옵티컬마우스라고 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명기로 인정받고 있고 - 사실 거품이라고 생각한다 - 웹캠 분야에서도 삼성이 빵집하는 거 마냥 이름값으로 날리고 계신다.

  그 중에서 만만한 거 하나 샀다. 고급도 아니고 중급도 아닌 어중간한 라인.





  무엇보다 재미있는 게 포장이었다. 마치 결혼반지마냥 박스 뚜껑을 열면 가운데 딱! 저 속에는 나머지 선과, 보증서가 들어 있다. 



  보증서라.. 빽빽하게 적혀 있는데 하여튼 결론은 천재지변이나 사용자의 명백한 잘못이 아닌 그냥 고장난 거는 무조건 무상으로 AS해준다는 내용이다. 2년인가.. 아마도. 옛날 어르신들이 삼성은 비싸도 AS가 잘 된다며 대기업을 칭송하던 소리 들었을 것이다. 마소도 마찬가지로 대충 '아저씨 고장났어요~' 하면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그냥 새걸로 바꿔준다, 바꿔줬었다, 옛날에. 지금도 잘 해주겠지 뭐.

  윈도우 8 이상에서는 웬만한 듣보잡이 아닌 이상, 주변기기 드라이버 같은 건, 설치 안 해도 알아서 다운로드 된다. 자기들이 만든 건데 잘 설치 되겠지. 설치 됐나 안 됐나 살펴보려면 설정으로 들어가서 연결된 장치 목록을 살펴보면 된다. 



  다른 컴퓨터에서 해보니까 웹캠 옆에 조그만한 글씨로 재부팅하라고 써 있었다. 컴퓨터에 따라 좀 다른 듯.

  하여튼 설치 됐으면 바로 테스트해보자. 스카이프나 다른 메신저 쓰고 있으면 화상채팅을 바로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냥 윈도우 기본 앱을 써보기로 했다. 앱 이름이 'Camera'. 간단하다.



몇 장 찍어보았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키보드. 가운데는 초점이 맞는데 바깥쪽으로 가면 흐려지고 색감도 엉망이 된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시커먼 곳을 찍어보면 잔뜩 노이즈가 보인다. 센서가 별로 좋지 않다.



사람 얼굴. 나다. 역시 웹캠은 인물 사진이 중요하지. 뽀샤시하게 나오네.

아래쪽은 노트북에 기본으로 달린 카메라.



 화각 차이가 심하다. 노트북 카메라가 보통의 화각이라고 할 수 있고.. 라이브캠은 얼굴 시원하고 큼직하게 달덩이처럼 잘 나오라고 화각이 좁다. 얼굴의 밝기는 화각차이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화각이 큰 아래쪽의 경우, 주변 밝은 영역이 많이 잡혀서 상대적으로 얼굴이 어둡게 나온다.

  웹캠에서 또 중요한 것은 소리. 녹음도 해 봤다.




  오오.. 괜찮은데? 그냥 음성 정도는 깔끔하게 들리는 편이다. 신디사이저 소리도 직접 연결을 한 것이 아니라 스피커에서 나오는 걸 마이크로 잡은 거다. 깔끔하게 들리잖아? 어째 화질은 별론데 음질이 좋으냐. 카메라보다 마이크에 신경을 더 썼나보다. 하여튼 웹캠 마이크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자세히 보면 손가락 움직임에 모션 블러가 끼어 있다. 웹캠 앞에서 달리기 할 거 아니잖아?

  그리고 거치 방식이 좀 특이한데 카메라 대가리 빼고 몸통은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철판으로 되어 있어서




이쪽 저쪽으로 잘 접힌다. 접어서 모니터에 걸어놓든지, 바닥에 세우든지 자유롭다. 꼭 찰흙 만지는 기분.



고개도 좌우로 돌릴 수 있다.



일자로 펴면 이런 모습. 아. 딱 마이크처럼 생겼네. 웹캠이 아니라 웹마이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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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pad2 - 대체 불가능한 메모장 대체 프로그램



  텍스트 에디트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메모장 말고 좀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찾기 마련이다. 가끔 간단하게 java를 돌린다거나 HTML, XML과 같은 마크업 문서를 보려면 제대로 된 텍스트 에디터는 필수이다.
  나 역시 프로그래머로서 왠만한 무료 텍스트 에디터 + 울트라에디터까지 다 사용해봤는데, 그래서 최종 결론은 Notepad2.

  대체 메모장으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기능들....

1. 가벼운 실행
2. 제대로 된 한글 작동
3. 넉넉한 되돌리기
4. 자동 인덴테이션
5. 신텍스 하이라이트
6. 라인 넘버 표시

정도로 생각했는데,
Notepad2는 여기에 더 좋은 기능들을 보탰다.

7. 반투명 모드
8. ESC로 종료
9. 창 위치 고정
10. 코멘트 토글
11. 다양한 인코딩
12. 창 타이틀에 경로 표시
13. 내용이 변경되었을 때 리로드 방식 설정

등등등.......
게다가 포터블 지원.
용량은 압축 안 해도 898kb! 푸하하
야호, 얼른 다운 받자!!

  구글에서 맨 처음 검색해서 나오는 페이지 바로 여기, http://www.flos-freeware.ch/notepad2.html 에서 다운받으면 된다.
  오픈소스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포크해서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어놨다.

   Modified Versions of Notepad2


  공홈(?)에서도 위의 항목으로 표시된 곳에서 다양한 포크들을 소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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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텍 RP500 - 좋은 느낌의 조작감, 살짝 거친 소리



디지텍에서 나온 일렉기타 멀티 이펙터이다. rp 시리즈 중에서 rp1000보다는 한 단계 낮고 rp355보다는 한 단계 위. 너무 조작이 불편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하이엔드급은 아닌 딱 적당한 수준이다. 자동차로 치면 준중형, 노트북으로 치면 13인치.

홈페이지 링크 : RP500 (discontinued) | Multi-Effects Switching System & USB Recording Interface (digitech.com)
들어가면 각종 소프트웨어와 매뉴얼 등 얻을 것이 많다.

내가 일렉기타 사운드를 기똥차게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모든 이펙터를 다 써본 것도 아니기에 비교 설명은 절대 불가하지만;;; 나름 신디사이저를 오래 다루면서 소리에 관해서는 듣는 귀가 있고, 또 이런 기계 만지는 것이 취미, 게다가 매뉴얼도 읽어본 사람이다 나는 푸하하하 ㅋㅋㅋㅋㅋ

왠만하면 매뉴얼은 훑어보는게 좋지 않을까나.
나름 받은 느낌, 핵심 기능 위주로 간략하게 적어본다.

*외장은 모두 메탈로 되어 있고 스위치도 메탈 재질이라 딱 튼튼한 느낌이 온다. 그러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노브 등등은 다 플라스틱.;;;

*튜너를 키려면 바이패스를 2초간 누르고 있어라! A를 보통 440Hz로 놓고 쓰는데 427에서 453까지 조절 가능하다. 혹시나 다운튜닝된 피아노와 같이 연주를 해야 한다면 유용할지도??

*대부분의 멀티이펙터가 그렇듯이 미리 들어있는 프리셋은 100가지나 되는데 딱 느낌이 오는 것은 없다;;; 수만가지 톤이 있어도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으면 말짱 도루묵. 결국에는 마음에 드는 거 한 두개만 쓰니 꾹꾹이나 마찬가지. 100개의 프리셋, 100개의 유저셋을 지원하고 톤 라이브러리라고 샘플톤을 즉각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멀티이펙터의 디스토션은 왠지 따뜻한 느낌이 없고, 다양하나 지저분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다. 너무 뻔한 톤만 나올 것 같고 동시에 너무 특이한 톤이 나올 것 같은 이상한 선입견. 특히 디지텍의 이펙터들이 좀 따가운 느낌이 드는 편이지. rp500도 그다지 따뜻한 느낌은 없는데, 대신 무진장 다양한, 그리고 대부분 쓸만한 그런 톤이 잔뜩 있다. 앰프 앞쪽에서 디스토션을 고를 수 있고, 앰프 시뮬레이터의 오버톤도 고를 수 있고, 막단에 캐비넷 톤도 고를 수 있어서 세 가지를 잘 조합하면 원하는 소리에 근접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론상 디스토션 18가지 x 앰프 52가지 x 캐비넷 25가지 조합을 만들 수 있다. 데모/프리셋 사운드만 들어봐서는 이게 얼마나 좋은 톤인지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모코어 하기 딱 좋은 (그리고 교회에서 자주 쓰는) 너무 빡세지도 않고 허무맹랑하지도 않은 알맹이가 꽉 들어찬 아주 그런 톤을 만질 수 있다.

*LFO가 2개나 들어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파라미터를 걸어 놓을 수 있다. LFO가 뭐냐고? 간단하게 트레몰로 생각하면 된다. 트레몰로는 LFO에 볼륨을 연결한 것이고, 그 밖에 다른 파라미터를 연결해서 자동으로 와리가리 한다는 것이지. LFO를 잘 이용하면 신디사이저와 같은 이펙터 소리를 얻을 수 있다.

*페달에도 당연히 여러 파라미터를 연결할 수 있다. 보통 앰프 게인이나 디스토션을 와우랑 같이 걸어서 효과를 내기도 하고, 아니면 리버브 같은 걸 걸어서 순간적으로 울림을 낸다거나.

*디지텍 시리즈의 페달은 다른 그 어떤 회사보다도 부드럽고 산뜻하고, 안정적이다. 페달 비교하면서 밟아보면 차이가 확실히 느껴짐.

*별에 별 잡다한 이펙터들 전부 내장. 코러스, 페이져, 플랜져 같은 건 종류별로 몇 가지씩 다 있고 옥타브니 피치 쉬프트니 뭐 그런 거랑 비브라토, 트레몰로, 야야, 등등 그리고 랜덤 와우, 랜덤 피치는 뭐야 ㅋㅋㅋㅋ 이런 것도 다 있음;; 멀티이펙터가 최고 쓸모 있을 때다.

*앞 쪽에 페달 버튼 5개로 프릿셋 톤을 선택할 수도 있고 페달보드처럼 하나의 프리셋 중에서 각 모듈을 온/오프하도록 할 수도 있고. 근데 디스토션 톤은 앰프시뮬레이터랑 같이 연동해서 만드는 거라 조절이 좀 어렵다. 앰프는 페달로 못 끄기 때문에.

*USB로 연결하면 소프트웨어로 설정할 수 있다. 일부 EQ관련 파라미터들은 컴퓨터 연결로만 조절 가능;;

*EQ는 3밴드에 프리퀀시 대역을 조절할 수 있다. 이큐에 목숨을 거는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부분... 최소 4밴드는 되야 속이 풀리는데;

*USB 레코딩이 된다. 전용 드라이버 깔면 오디오 인터페이스가 하나 더 생기고, 단순한 오디오 인 아웃과 똑같이 동작한다. 아날로그 오디오 신호로 전송해서 녹음하는 것보다 디지털로 전송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음질이 더 좋겠지?

*다이렉트 박스 내장 - 캐논(마이크잭) 출력 가능. 스테레오 가능. 리버브나 오토팬 같은 효과에서 스테레오 사용하면 좋음.

*루프 기능을 지원한다. 쉽게 말해서 짧막한 레코딩 + 무한 반복 기능. 옛날에 구입한 사람들은 펌웨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업스위치를 2초간 누르고 있으면 기타를 플레이하자마자 스타트가 되고 3초간 누르고 있으면 다운스위치를 누를 때 스타트가 된다고. 다운스위치를 눌러서 레코딩을 시작하거나 멈출 수 있다.

*페달 앞쪽을 꽉 밟으면 와우 온/오프를 할 수 있는데, 이거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와우 꺼질까봐 앞에서만 깔짝 깔짝 한다거나(그래봤자 결국엔 어쩌다 건드려서 와우 꺼짐) 아니면 와우를 켜기 위헤 스카이 콩콩을 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음
.
*역시 멀티이펙터는 이어폰으로 꽂아서 듣는 재미. 컴퓨터 스피커 연결해서 소리 들을 수도 있고, 스테레오 출력 기능으로 사용해도 좋고; 참고로 나는 앰프 없음 깔깔깔 (사실은 연주할 공간이 없어서 ㅜㅜ)




이것이 제공 소프트웨어의 모습이다.
모든 파라미터들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마우스로 수정하는 즉시 이펙터에 반영되어 소리를 들어보면서 조정한다.
저장된 세트들을 백업/복구하는 기능이 가장 필요할 것이다.
펌웨어 업데이트 전에 반드시 백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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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재미없는 글 잘 쓰는 법

*누구나 글쓰기를 잘 할 수 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문재(文才)'가 없는 '유전적 불운'을 한탄한다. 시나 소설이라면 그래도 상관이 없다. 하지마 문학작품이 아니라 생활 글쓰기나 논리 글쓰기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직업적 글쟁이로서 논리 글은 나름 수준 있게 쓴다고 인정받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괜찮은 시인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데 만족하며 산다. 아무나 시를 쓰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준 시인이 여럿 있다. 안도현 시인도 그런 사람이다. <너에게 묻는다>는 그런 작품 중에서 제일 짧은 것인데, 그 첫줄은 이렇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시인이 왜 이렇게 말했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연탄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단군 할아버지가 한반도에 터를 잡은 이후부터 50여년 전까지, 몇넌 년 동안 우리는 나무를 태워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었다. 인구가 빠르게 늘어난 조선 후기에 숲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의 약탈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의 야산은 거의 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농민들은 어린 나뭇가지와 낙엽까지 모두 긁어다 연료로 썼다.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생계형 도벌'을 한 것이다. 정부는 멀쩡한 숲을 통째로 베어 목재로 팔아치우는 '상업형 도벌'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우리는 숲이 생명력을 회복한 것은 연탄이 나무와 숲을 대체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1970년대에 들어 구벙이 열아홉 개 뚫린 연탄이 가정용 에너지원으로 널리 자리 잡았다. 1990년대에는 소득수준이 더 높아져 석유, 가스, 전기가 연탄을 밀어냈다. 20여 년 동안 주택가 골목 어디나 타고 남은 연탄재가 쌓여 있었다.
  무언가에 화가 났지만 화풀이할 곳이 달리 없는 사람들은 그 연탄재를 발로 찼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날렸고, 주변에서는 혀를 찼다. '왜 연탄재를 차고 난리람? 먼지 날라면 사람한테 해롭잖아. 골목길도 지저분해지고' <너에게 묻는다> 첫 행에 이 생각을 이어 붙이면 이렇게 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부서진 연탄재 네가 치울 거냐.

  논리 글쓰기는 이런 것이다. 이 정도라면 나도 쓴다! 그런 생가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이런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어려울 게 없다. 그런데 시인의 상상력과 감성은 다른 곳으로 뻗어갔다. 그 연탄재가 한때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였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연탄이 제 몸을 불살라 내뿜은 열기로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허기진 가족을 위해 밥을 지었고 하루 일에 지친 몸을 달래었다. 그 뜨거움 위에서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고 늙은 부모를 모셨으며 소중한 딸, 아들을 키워냈다. 사랑도 열정도 헌신도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널리고 널린 세상, 도대체 그 누가 겨울 골목길의 연탄재를 걷어찰 합당한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해직교사였던 안도현 시인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마침표도 쉼표도 느낌표도 없는 석 줄짜리 시를 쓴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던 전교조 교사들이 진심을 물라조는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건 말 그대로 예술이다! 창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노력하면 누구나 이렇게 쓸 수 있다고? 거짓말이다. 어머니 배에서 나올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뇌세포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우주만큼이나 복잡하고 오묘한 연결망과 정보처리 시스템을 만든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특별한 감성과 언어 감각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야 이런 시를 쓸 수 있다. 수 십 년 글쓰기로 살아온 나는, 이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내가 시를 쓰지 못하는 사람임을 거듭 자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큰 불만을 느끼지 않고, 잘 쓸 수 있는 글을 쓰며 살았다. 20대 청년기는 소위 '선전선동(宣傳煽動)'을 위한 글쓰기로 보냈다. 그때 정부는 허위 사실을 유포해 세상에 대한 불만을 조장하는 것을 '선전'으로, 정부에 맞서 싸우라고 대중을 부추기는 것을 '선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전'은 사실과 진실을 알리는 것이었고 '선동'은 용기를 퍼뜨리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의미의 '선전선동' 사업을 벌이는 데 필요한 '불법유인물'을 만들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중...

  속았지? 안 속았나? 유시민이 쓴 거다 ㅎㅎ 내가 발췌한 이 문장에는 지금 리뷰하려고 하는 이 책의 의도가 정확하게 들어있다. 문학적 글쓰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논리적 글쓰기는 요령을 알고 연습만 하면 누구든지 잘 쓸 수 있다. 는 게 이 책의 생각이고, 그 요령을 알려주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더불어 위의 발췌문은 이 책의 특징을 고스란이 담고 있으니 위의 글이 마음에 든다면 얼른 구매해도 좋다.

*잡다한 수다가 한가득

  유시민이 실제로도 그런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책에서만큼은 말이 무진장 많은 수다쟁이 아저씨다. 절대 간단한 요약으로 설명하는 법 없이, 줄줄이 옛날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어쩌구 저쩌구 해가면서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렇다는 투다. 연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기 위해 대뜸 단군할아버지가 등장하고, 조선 후기의 인구 폭발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줄줄이 서사의 결론은 나는 안도현만큼 시는 못 써도 잘 먹고 잘 살았다. 는 간단한 것이다.
  어때, 그래도 재미있지 않나? 니가 연탄을 차면 주변에서 혀를 찬댄다. 딱딱한 문장 사이에도 유시민 나름의 흥미 유발을 섞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읽기가 부담스럽지 않다. 내가 제목에 글쓰기의 정석이 아니라 글쓰기의 열린교과서라고 써 놓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반대로 아 그래서 빨리 내가 필요한 글쓰기 묘수를 알려달라고! 하고 부추기는 성급한 독자는 지루할 지도 모르겠다. 호흡이 긴 이야기에 익숙치 않은 사람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템포가 느려도 너무 느리다. 꼭 문장 하나에 200자가 들어있어야 만연체가 아니다. 이렇게 정갈한 문장으로도 만연체가 가능하다는 사실, 유시민을 만나기 전에는 모를 거다.

*필요한 부분에서는 잠깐 스톱

  이따금 잘 된 문장과 잘못된 문장의 예시를 보여줄 때가 있다. 여기서는 갑자기 급공부모드로 돌아서야 한다. 책의 앞뒷장을 넘겨가며 꼼꼼이 비교를 해야 책값을 뽑을 수 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 즉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관은 이 유령에 대항하는 신성한 몰이사냥을 위해 동맹하였다.

  요것은 강유원이라는 사람이 옮긴 <공산단 선언> 이다. 이걸 유시민이 고친 것은 아래와  같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낡은 유럽의 모든 권력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비밀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한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여기서 요점은 운율이다. 아무래도 선언문이기 때문에 리듬감이 중요하다고. 글을 쓸 때도 말하듯이 쓰는 것이 좋댄다. 즉, 말로 읽어서 어색한 문체는 삼가라는 것.
  이걸 이해하려면 위 아래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기억에도 잘 남게 된다.

*글쓰기의 A to Z


차례

글쓰기가 두려운 그대에게

1. 논증의 미학

2. 글쓰기의 철칙

3. 책일기와 글쓰기

4. 전략적 독서

5. 못난 글을 피하는 법

6. 아날로그 방식 글쓰기

7. 글쓰기는 축복이다

8. 시험 글쓰기


차례만 훑어봐도 알듯이 글쓰기를 처음 대하는 자세에서부터 논리에 대한 기본 개념, 설명문의 주요 특징, 독서를 통해 글쓰기를 향상시키는 방법 등 별의 별 내용이 다 들어있다. 논술시험을 코앞에 둔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대비 방법도 있고, 심지어는 '정신승리'를 주제로 한 내용도 들어있다. 아니, 트위터나 댓글논쟁에서 정신승리하는 방법을 다룬 건 아니고 ㅋㅋ 글쓰기가 싫어질 때 어떻게 스스로를 달래면서 글을 썼는가 하는 내용이다.

*블로그를 쓸 때, 유시민이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된다.

  요즘 글 쓰기의 트랜드는 딱 하나, 재미다. 여러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필력'을 논할 때, 그 기준은 같은 내용이라도 얼마나 재미있게 쓰느냐다. 유시민이 시키는 대로 글을 쓰면 그야말로 노잼이다. 문장을 끊을 줄 몰라서 못 끊는 경우를 빼고, 의도적으로 쓰는 만연체의 동기는 줄줄줄 이어지는 문장의 재미다. 위에 설명했듯이 유시민도 글의 재미를 위해 문장은 단순하지만 내용은 만연체나 다름이 없이 글을 썼다. 글이 재미있으려면 다양한 문장 구조가 튀어나와야 하고, 반전도 있어야 하고, 때로는 문법과 맞춤법도 파괴해야 하는데, 이 책에서 그런 건 절대 안 알려주지~
  실생활에서 논설문을 써야 하는 상황은 주로 댓글이나 트위터로 논쟁을 할 때이다. 이런 경우에 승리하는 최고의 방법은 재미나게 써서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이다. 논증 불가능한, 그래서 사실상 논리가 아닌 내용도 상관이 없다. 트위터에서 리트윗 되는 대부분의 문장은 촌철살인 유머다. 그런 공간에서 이 책의 가르침대로 글을 썼다가는 당신의 멘탈부터 붕괴될 것이다. 아무리 정리 정돈 잘 해서 논리를 펼쳐봐야 소용이 없고, 이건 벽에다 대고 헤딩하는 꼴이니까. 좋은 논설, 가장 설득이 잘 되는 논설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글이다. 이 쯤 되면 이미 문학과 예술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유시민이 얘기하는 요령들은 나쁜 글을 안 쓰는 요령은 될 수 있지만 좋은 글을 쓰는 요령은 못 된다. 좋은 글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문학적 글이어야 한다.
  이 책에 있는 문장 하나 하나는 모두 이 책이 설명하는 원칙에 입각해서 쓰여 있다. 그래서 문장이 재미가 없다. 너무 깔끔하고 단정해서. 김어준이 쓴 책이 드럽게 산만해서 도저히 읽기가 힘든 수준이라면 유시민의 책은 아, 너무 밋밋해서 지루해. 그래, 이런식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니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유시민처럼 글을 쓰면 유시민처럼 살게 되는 거 아닌지. ㅋㅋㅋ

*이 책 때문에 블로그를 다시 시작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도 꾸준히 글 많이 써서 멋진 글쟁이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일단, 이 책의 저자가 글쓰기로 돈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자나. 글쓰기는 티끌 모아 태산 맞다. 이건 이 책의 주장인데, 나도 동의한다. 꾸준히 쓰다 보면 실력이 는다. 왠지 이렇게 블로그 하나 하나씩 포스팅하다보면 어느샌가 나도 글쓰기 고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 읽고 나서는 다른 사람의 글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 사람들 유시민이 시키는대로 글을 썼나 안 썼나 보게 된다. 나름의 잣대가 된 것이다. 평가의 기준이 생긴다는 건 어쨌든 실력이 좀 늘었다는 거 아닌가.
  나도 유시민처럼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 라는 매우 반듯한 결말.

*구글북스에서 샀다. 얼마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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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FC750R 청축 - 조용하고 단단한 기계식 키보드






  바로 위의 동영상은 내가 구입해서 잘 쓰고 있는 레오폴드 청축과 커스텀 키보드인 적축을 비교한 영상이다. 같은 청축끼리 비교하면 좋겠는데, 당장 가지고 있는 키보드가 없어서..;; 위의 동영상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특징은 두 가지다.



*매우 정갈한 소리

  청축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시끄럽지 않다. 다른 축은 아마 커스텀 키보드 못지 않게 조용할 것이다. 바로 위의 테스트 영상에서 비교 대상으로 쓰는 키보드는 직접 제작한 커스텀 키보드로서 내부의 울림 공간이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굉장히 조용한 편에 속한다. 기성품 청축에서 그에 견줄만한 소리가 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모든 소리나는 악기, 스피커가 그렇듯이 키보드의 소리도 핵심은 하우징(키보드 전체 껍데기)의 울림이다. 특히 하우징 내부에 공기가 많이 들어있을수록 큰 소리가 난다. 레오폴드는 내부 공간을 스폰지로 채웠다.





홈페이지의 상품 설명에 나타난 그대로다. 그리고 이건 대단한 효과를 나타낸다.

  소리도 감촉이다. 키감에서 소리를 빼는 것은 게임의 타격감에서 소리를 빼고 논하는 것과 같다. 키보드의 감촉에는 당연히 소리가 포함되어야 한다. 750R은 단단한 보강판 + 두꺼운 PBT키캡 + 정갈한 소리가 만나서 다른 키보드에서는 느끼기 힘든 정갈하고 경쾌한 키감을 보여준다.

*화끈한 스테빌라이저

  스테빌라이저라 함은 큰 키캡이 좌우로 기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지지대로서, 쉬프트, 스페이스, 엔터와 같은 큰 키캡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키감에 악영향을 주기 일쑤다. 눌렀을 때, 다른 키와 마찬가지로 경쾌하게 눌려야 하는데, 마치 밑에 젤리라도 댄 것처럼 푹신하거나 움직임이 뻑뻑하거나 하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각별한 불쾌감이 밀려온다. 특히덕키사에서 만든 키보드의 스테빌은 최악이다.

  레오폴드의 스테빌라이저는 다른 키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경쾌하다. 팍팍팍! 시원스럽게 밀려들어가서 보강판에 탁! 하고 부딧힌다.

*레오폴드 옛날엔 안 이랬다.

  2010년경만 해도 키보드는 그래도 마제 키보드였다. 레오폴드는 괴상한 스페이스바 스테빌 위치, 특유의 부실한 마감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샌가 마제 키보드의 중고 매매가격이 팍팍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무터 10만원대의 국산 키보드가 흥하기 시작한 것 같다. 지금은 비싸기만한 마제 키보드보다 훨씬 낫다고 자부한다.


제닉스의 타이탄 마크 세븐



요건 레오폴드 750R

사진들 전부다 자사 상품 소개에서 퍼옴

  제닉스 키보드는 특유의 게임덕후스러운 무시무시한 디자인으로 라이트 유저를 노린다면 레오폴드는 무난히 즐길만한 디자인을 갖추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 디자인도 없다! 그냥 네모 박스에 키캡을 박아놓았을 뿐. PC방이 아닌 이상, 집이나 사무실에서 쓸 때는 이런 NO디자인 컨셉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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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3 리뷰 - 허접한 게임성에 충실한 역사 시뮬레이션

  오랜만에 PC에서 즐길 만한 삼국지 시리즈가 나왔다. 삼국지 11이 나온지 벌써 10년만이다. 삼국지 12가 모바일에서 즐길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다소 완성도가 떨어졌다면 이번 13은 야심차게 PC용으로 나온 것이다.





 *영걸전 - 캠페인 모드

 영걸전은 튜토리얼을 겸하는 캠페인 모드다.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가면 삼국지 대부분의 내용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FPS와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온라인 대전을 주로 하는 RTS장르들이 충실한 캠페인을 갖추고 있는 유행을 따라갔다고 볼 수 있겠다. 초기 메뉴에서도 영걸전이 본편보다 위에 있는 만큼 본편보다 오히려 주력이 되는 컨텐츠다.



  위의 메뉴에서 영걸전이 캠페인 모드, 본편이 보통 하던 삼국지다.

 영걸전의 캠페인은 상당한 양의 동영상과 많은 양의 이벤트 대사들을 모두 모아 충실하게 구현했다. 삼국지를 구매한 유저라면 본편보다 우선 영걸전을 먼저 클리어하고 본편은 커스텀 시나리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일단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단' 좋은 점수라고, 좋게 평가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영걸전 시나리오의 내용을 이미 유저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엔딩까지 스토리를 이미 다 알고 있다면 RPG 게임이 재미있을까? 코에이 삼국지만의 특별한 해석이나, 재치있는 대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각종 동영상과 이펙트로 연출을 열심히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쯤 되면 게임 플레이는 이미 아는 내용, 아는 이벤트를 보기 위한 노가다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시리즈의 삼국지를 하면서 한 번도 조조를 플레이한 적이 없다. 조조는 쉬워서 재미없고, 또 역사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재미없다. 유비, 손권이나 동탁, 여포, 원소와 같은 특별한 세력으로 클리어를 할 때 역사를 뒤집는 재미가 있다. 동오의 덕왕 엄백호로 삼국지를 클리어하는 걸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지 않았나. 이 영걸전 말고 원래 진짜 영걸전만 봐도, 삼국지 그대로의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다. 스토리만 비슷할 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의 대사까지 평범한 삼국지13의 영걸전은, 그렇게 재미있지 않다.












  조조가 출정하면서 주고 받는 장면이다. 극화체와 만화체를 섞은 듯한 그림 연출은 멋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사가 심심하고 뻔한 것이 퀄리티가 너무 떨어진다. 애들 보는 역사 만화도 저런 영혼 상실한 대사는 없다. 13편 고유의 인물 해석은 커녕 있는 그대로의 모습조차 제대로 연출이 안 된다.



  더불어서 심하게 안습하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이게 무슨 튜토리얼인가, 그냥 설명서고 그냥 연습하는 거지. 저런 형태의 설명은 내가 산업용 비전 검사 프로그램 제작하면서 같이  딸려가는 설명서 만들 때나 쓰는 거지, 게임이 무슨 이래. 삼국지 11에 등정하던 간지폭풍 내정의 달인 유비는 어디로 갔는가.

 *스킵할 수 없는 각종 이펙트

  본 게임 내에서는 모든 대사와 인터페이스 요소, 인물 그래픽에 모두 그래픽 효과가 들어있어서 마우스를 광클릭한다고 재빠르게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페이드 인/아웃되는 것을 모두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 처음 게임을 접할 때는 충분히 여러 대사에 감동을 느끼면서 느긋하게 진행하게 되겠지만, 차츰 대부분의 컨텐츠를 소비하고 나면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봤던 대사, 봤던 이벤트는 빨리 빨리 넘어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버튼 한 번 눌렀을 뿐인데 저렇게 페이드 인 이펙트로 메뉴가 나온다. 모든 대사, 장면 등 모든 화면 전환 및 등장 스프라이트에는 저런 이펙트가 동반되어 나온다. 빨리 다음 메뉴를 누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오직 느긋한 마음으로 저런 것들을 천천히 지켜봐야 한다.

  장수가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무작위로 수상한 상인과 설전 이벤트가 뜨는데, 마치 RPG에서 던전을 움직이다 적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이걸 자주 겪으면서 떠오른 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조금 지나치다면 슈퍼로봇대전 시리즈다. 파이널 판타지에서 적을 한 번 만나면 각종 이펙트와 효과로 전투가 시작하는데, 이걸 스킵할 수 없다. 간단히 몇 합 주고받는 전투에서도 주인공이 달려가서 때리고, 적이 피해를 받고, 어쩌구 하는 효과들을 모두 봐야 한다. 전투 한 번 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슈로대는 어떤가? 로봇이 총 한 번 쏘려고 하면 무진장 긴 동영상을 무조건 봐야 한다.




  요렇게 간단히 대화를 주고받고 메뉴를 보는 데도 5초는 걸린다. 그놈의 이펙트들 때문에.

  설전 메뉴를 선택하면 전투로 돌입하는데 10초 정도 걸리고...






자 드디어 본격 전투.
여기서 다섯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면!





캬.. 이렇게 서로 1합 주고받는 데만 한참 걸리네.



  그림만 봐도 느낌이 오지 않나? 이건 일본식 RPG에서 자주 나오는 강제 전투 연출. 결정적으로 별로 멋있지도 않다.

  기존의 삼국지 시리즈는 유저의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번 삼국지는 기존 일본 게임의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왔다. 어떤 유저들에게는 좋게 어필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한 번 클리어하고 접을 수 있는 RPG시리즈에서나 유효하며, 각 국의 군주로 엔딩을 여러 본 보는 삼국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빨리 빨리 중요한 컨트롤만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각종 에니메이션이 발목을 잡는 거다. 이것이 결국 유저의 피로도를 증가시키고, 반복 플레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삼국지의 중요한 컨텐츠 하나를 포기한 셈이면서, 영걸전에 더 힘을 쏟은 인상을 주는 이유다. 영걸전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본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불편한 인터페이스


  삼국지의 전략과 전투는 모두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빠르고 간편한 조작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스타크래프트와는 다르게 시간을 멈추고 여유롭게 컨트롤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지만, 그게 해결책이 아니다! 여기서 느낌표! 게임을 하다 보면 너무 화가 나기 때문이다. 어째서 RTS 시스템의 게임이 턴제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는 걸까? 이동, 공격 명령을 하는데 마우스 우클릭 한 번이면 될 것을, 부대를 하나 선택해서 팝업 메뉴 중 이동을 누른 뒤, 이동할 곳을 클릭, 이렇게 복잡하다. 이건 턴제에서 쓰던 방식 아닌가. 그래서 세밀한 컨트롤을 위해서는 시간 정지가 필수다. 시간을 멈추고 명령, 조금 상황을 본 뒤 시간을 멈추고 명령. 이게 뭐야 정말...


우리편 부대는 신야에 모여있고, 적은 여남 방향으로 있을 때, 부대 공격 명령을 내리려면




먼저 우리편 부대를 클릭한 뒤



진군 명령을 클릭한다.




적 부대를 클릭하고,



여기서 또 공격 대상 부대를 골라야 한다.

이렇게 네 번이나 클릭해야 하는 일을 모든 부대에 빠짐없이 해야 한다. 클릭할 때마다 지연을 유발시키는 그래픽 이펙트는 덤이다.


전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명령을 내릴 부대를 클릭하고



그 중에서 이동 명령을 고른 뒤,


이동할 장소를 클릭한다.

  그나마 전투맵에서는 드래그로 전체 지정이 가능해서 낫다. 다만 그렇게 하면 전투에서의 전략은 없어지는 것이지만.

  전투맵의 일부는 이동 불가능한 곳인데, 눈에 띄질 않는다. 괜히 잘못 움직였다가 벽으로 몰려서 죽는다. 움직일 수 없는 곳은 시각적으로 눈에 띄어야 하는게 당연하지 않나. 아마추어도 아니고.

 아래 그림에서 빨간 네모로 표시한 곳은 언덕인데 지나갈 수 없다. 알고 나서 보면 언덕 같지만 그냥 게임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아래처럼 화면을 축소해서 명령을 내릴 때는 더더욱 눈에 안 보인다.



이것은 한 예일 뿐, 전투맵 곳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많다.

  이렇게 불편하기 때문에 소규모 병력으로 컨트롤 잘 해서 이기는 것은 점차 포기하게 되고 그냥 물량으로 밀어붙일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후술할 문제와 겹쳐서 그냥 물량전, 각개격파 전투가 된다. 많은 병력을 주면 내가 컨트롤 안 해도 어차피 알아서 이기므로 전투는 그냥 위임하게 된다. 필드맵에서 부대 움직이는 것도 바쁜데.  결국 게임이 점점 재미없어지는 거다.


*그냥 물량전, 각개격파


  위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엄백호와 같은 인물이 통일을 이룰 확률은 얼마나 될까? 현실에서는 업백호가 만 번 다시 태어나도 만 번 모두 실패할 것이지만, 삼국지 11에서는 가능했다. 제갈량만 있으면 조조가 대륙 전체를 먹고 있거나 말거나 다 이길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사기적 성능을 갖춘 무장들이 게임 밸런스를 망친다고는 하나, 게임 삼국지 11은 정말 게임으로서 충실한 것이다.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에서 게임성은 극대화된다.

  삼국지 13은? 엄백호를 잡으면 만 번 게임을 해도 만 번 진다. 천하의 제갈량이라도 북벌을 성공하지 못하면 도저히 조조의 병력을 당해낼 수 없다. 전투에서 아무리 병력 배치를 귀신같이 해도 물량 앞에서는 답이 없다. 너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력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각 국의 군세와 상황도 역사를 기준으로 흘러간다. 기존 시리즈에서는 시작만 역사대로 시작할 뿐, 1년만 지나면 각 국의 군세나 장수들의 등용 상황이 개판이 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런 기능이 필요하다고는 하나, 판타지가 존재하지 않는 건조한 전투와 시너지를 일으켜 아무 이변도 없는 게임이 된다.

  이것이 역사 시뮬레이션으로서는 충실한 걸까? 아니, 오히려 본래의 삼국지 콘텐츠를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삼국지 13에서는 장판파도 없고, 귀신같은 제갈량의 전법도 없다. 그 제갈량을 천여 병력으로 막았던 학소도 없다. 현실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판타지다, 특히 나관중의 삼국지는 더욱 그렇다. 삼국지의 기묘한 전략 전술은 없고, 물량전만 남았다.

  그래서 삼국지 13의 유일한 전술은, 각개격파다. 그저 많은 병력으로 적은 병력을 잡아먹는 것이 게임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의 전부다. 심지어 소규모 전투에서도 그렇다. 일부 병력을 유인해서 야금야금 각개격파하는 것이 정답이다. 장판파 같은 걸 하면 100% 진다. 상대방의 병력이 많을 때, 시원하게 역전할 수는 없고 계속 도망다니면서 갉아먹어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피곤한 경험이다.

*개성없는 장수들


  삼국지 13은 시리즈 최악의 몰개성을 자랑한다. 이전 작은 최소한 S급 장수는 S급 능력을 보여주기라도 했고, 11에서는 각 장수마다 독특한 능력이 있기라도 했지, 13은 아무 것도 없다. 각 장수마다 가지고 있는 전법은 많은데, 결국 사기, 방어력, 공격력을 올리거나 내리거나. 아니면 잠깐 적을 도망치게 하거나. 전법 간에 개성이 돋보이지 않는다. 그것도 전법 포인트가 모여야 겨우 한 번씩 쓸 수 있는데, 제일 좋은 전법을 가진 장수의 것만 계속 쓰고 나머지 장수들은 무슨 전법인지 관심도 없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전투에서 강한 장수가 어떻게 얼마나 강한지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부대끼리 싸우면서 비비다 보면, 어느 한 쪽은 병사가 빨리 줄고 어느 한 쪽은 병사가 덜 줄어드는 것으로 체감할 뿐이다. 강력한 필살기가 돋보였던 11편에 비해 13편은 그저 부비적 부비적이 전부.


*아무 필요도 없는 인간관계


  장수제 게임으로서 다른 장수들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는 무척 흥미진진한 요소고, 현실감, 몰입감 면에서도 좋으나, 사실 게임의 승패와는 큰 상관이 없다. 결혼해서 H 씬을 볼 것도 아니고. 딱 하나, 장수 등용에만 관계가 있다. 그런데 타국 장수와 친해지는 것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고, 단지 친해졌다고 꼬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인간 관계, 특히 같은 진영 내의 인간 관계는 실제 게임 진행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나마 군주인 손권과 친해지면 고위직을 얻기 쉬워지는 정도.

  게다가 게임이 중반 쯤 넘어가면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인간관계는 잊어버리게 된다.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선물이 필요한데, 초반에 느긋할 때는 선물 살 돈이 없지만 후반에는 돈 쓸 겨를이 없다.


이 장면이 207년부터 조조와 싸워서 231년이 된 것이다. 싸우는 동안 돈 쓸 겨를이 없어서 50000골드가 넘었다. 그저 조조와 반땅 싸움을 하는 것 조차 우리편 AI의 삽질 때문에 내가 열심히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220년 경에 멸망할 것을 쉴 새 없이 싸우고 또 싸워서 여기까지 끌고오고 나니 피곤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상한 건 원수 시스템이다. 자기 친한 사람을 죽인 놈을 원수로 삼는데, 전투에서 원수를 만난면 유저의 명령을 듣지 않고 무조건 돌격한다. 이 때문에 불리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전 장수가 따라서 들어가거나 혼자 죽게 내버려두거나. 원수가 생기는 것이 어째서 패널티가 되는 걸까. 유비가 이릉 전투를 일으켜 촉을 대차게 말아먹은 것을 재현한 걸까?

*AI

  삼국지의 AI는 늘 까임의 대상이 되어 왔다. AI가 꼭 완벽할 필요는 없다. 상대 컴퓨터 AI의 허술한 점을 이용하는 것도 게임의 재미 중 하나니까. 그런데 문제는 항상 우리편이다. 특히 도독이 되었을 때, 우리 군주가 내 직할 도시에서 병력과 장수를 빼간다. 빼가서 대규모 병력에 꼴아박는다. 내가 차곡차곡 군비를 쌓아두면 그걸 군주가 홀랑 까먹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어찌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으랴. 멍청한 AI를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경험은 플레이어에게 박탈감과 무기력감을 준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결국 우리편 AI 때문에 망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냥 하기 싫어진다. 본래 장수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직접 들어가서 참여하고 함께하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 멍청한 상관을 두어서 불편하고 피곤한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다. 적당히 자기 병력만 지키고 있어도 좋으련만, 내 직할 병력까지 다 끌어모아서 적에게 바치는 우리 군주님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조의 5만 대군에 8천으로 꼴아박고 있는 감녕. 내가 다스리는 도시에서 말도 없이 병력을 빼내가서 저렇게 소모시킨다. 어? 내 도시에 병력 어디갔어? 하고 찾아보면 저 모양인데, 취소하고 되돌릴 수도 없다. 막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군주 AI 앞에서 무기력하다. 이게 내 돈 주고 내 시간 내서 시작한 게임에서 느껴야 하는 경험이 맞는 건가.


*결론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 대한 애정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열심히 플레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편하고 짜증나는데 이것 저것 섞어놓고, 연출도 허접하다. 삼국지 11이 최고였고, 거기까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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