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인도자를 위한 조언

회중찬양 리더를 10년 이상 하면서 노하우가 생긴 게 많다. 처음에는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그냥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실수 투성이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같은 실수를 겪지 않도록 내가 깨달은 바를 글로 써 본다. 나름대로 10년 노하우의 정수를 담았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고 엉켜 있는데 그냥 되는대로 일단 적어본다.

참고로 지금 글을 쓰는 본인은 현재 교회를 안 다니고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하지만 믿는 사람이 보기에 거슬리는 내용은 없다고 자부한다. 교회도 안 다니면서 왜 이런 글을 쓰는가? 모르겠다,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서.



회중이 원하는 찬양을 하라


찬양은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 당연히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찬양을 한다. 문제는 찬양은 누가 하는가? 이다. 내가 아니라 회중이 한다. 찬양 인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회중들이 하고 싶은 찬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을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런데 그 찬양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아는가? 찬양인도자인 당신에게만 하나님이 몰래 귀뜸을 해주는가? 그 찬양을 찾는 첫 번째 비결이 바로 회중이 원하는 찬양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 당사자인 회중에게 먼저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 개인의 느낌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

찬양 리더가 되면 회중에 엄청난 영감을 불어넣고 싶은 욕심이 굴뚝같다. 하지만 찬양 리더의 첫 걸음은 눈높이를 회중에 맞추는 것이다. 진짜 중요하니까 한 번 더 말하겠다. 회중들이 원하는 찬양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찬양 리더의 첫 번째 역할이다. 인도자는 회중을 앞서가기도 하지만 뒤에서 따라가기도 한다. 인도자로서 준비와 계획은 철저히 하되, 항상 회중이 먼저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섬김의 자리에 있다. 교회와 회중을 위해 바짝 엎드릴 준비를 하라.



은혜란 무엇인가?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을 한다. 어쩌면 모두가 은혜 충만한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찬양 인도자로서의 목적이 될 수도 있겠다. 은혜라는 것은 예배를 드릴 때 느끼는 좋은 감정이다. 오늘 예배 잘 드렸다~ 하는 것도 다 내 마음에 흡족하다~ 결국 이런 뜻이다. 예를 들어, 나는 고통스럽고 힘들게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기뻐 받으셨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은혜받았다는 말을 안 쓴다. 자기 감정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성숙한 신앙생활의 열매 중 하나일 순 있는데, 대부분의 회중들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닌 것 같다. 그저 본인 마음에 흡족하게 찬양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약간은 이런 슬픈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자.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자연스럽게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회개의 눈물을 흘린다거나,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해 감격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분명 좋은 예배의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도록 바라고, 노력하는 것이 찬양인도자의 사명일 것이다.

우리가 예배 중에 감정적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자꾸 경계해야 한다.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보다 내 마음이 흡족한 것을 먼저로 생각하는 게 아닐지.

한 가지 본인의 경험으로 확실한 것은, 인도자가 그런 감정/감동에 집착할 수록 주님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주님과 멀어질수록 예배의 감동도 사라진다. 우리는 감정에 메마르고 위로가 필요할 수록 더욱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너무 감정적인 예배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무난하고 때로는 건조할 수도 있는 평온하고 온화한 예배를 추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경우가 많았다.

회중이 원하는 찬양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찬양은 무엇인가? 같이 고민해보자. 동시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찬양은 무조건 이것이오! "하면서 고집을 부리는 것에도 경계하자. 인도자의 카리스마를 발휘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됨을 먼저 생각해보자.



당신의 기분은 예배와 아무 상관이 없다

찬양인도자의 기분과 상태는 회중의 은혜와 별개의 것이다. 본인이 즐거우면 좋은 예배가 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흥을 돋구기 위해 소리를 지르거나 음악적으로 뭘 하려고 하는 행위를 특히 경계해야 한다.

당신이 찬양인도자로서 철저하게 도구로 쓰일 준비를 한다면 그 때는 성령께서 당신부터 채워주실 것이다. 은혜는 음악이나 가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진 삶으로부터 온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삶에는 당연히 주님의 위로가 있다. 그런데 위로만 받고 싶고 삶은 안 드리고, 그게 우리의 문제이다. 그럴 때 받을 은혜는 회개밖에 없다.

찬양인도자인 당신마저 위로만 바라는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기분을 내려하지 말고, 먼저 헌신할 준비를 하라.


음악은 중요하다


한 때는 음악이 오히려 성령님의 진정한 활동을 방해하고 인위적인 우리의 감정을 넣는다면서 극히 제한적인 음악적 요소만 넣으려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예를 들어 1000년 전 중세에는 화음을 넣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겨서 무조건 단음으로 찬양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음악적 감흥이란게 그렇게 불순한 것인지, 혹은 이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해봐야 한다.

산 속에 있는 기도원에 가면 통성기도할 때, 전쟁이라도 난 것 마냥 북을 쾅쾅쾅 두드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북 소리가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더 흥분이 되고 감정이 격해지는 것이다. 북 소리에 따라 기도하면 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인지 고수의 인도를 받은 것인지 헷갈린다. 내 마음에 드는 이 절실하고 흥분된 감정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물론 근본이야 내 믿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겠지만 북소리가 없었으면 내 마음이 이렇게 고조될 수 있었는가? 아 저놈의 북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찬양인도하는 사람들이 각종 음악적 다이내믹한 요소들을 넣어가며 어떻게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발버둥치지 않나. 우리는 그런 노력에 익숙하다.

CCM이 아무리 컨템포러리한 21세기 음악 경향을 모두 담는다 해도 트로트 뽕짝으로 된 찬양은 없다. 있다고 해도 그게 회중찬양에 적합할 수는 없다. 반주도 다 틀리는 엉터리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뵙기란 쉽지 않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음악의 영향 아래 있다. 성령님의 일하심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겠지만, 성령님이 일하실 수 있는 적절한 상황과 여건을 만드는 것이 예배인도자의 사명이다. 

이제 나의 결론이다.
찬양 인도할 때는 너무 음악 요소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거는 다 티나고 거슬리기 때문이며,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마음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 하라. 안 틀리고 듣기 좋도록, 회중들이 불안해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도록, 곡의 흐름에 맞도록, 은혜로운 찬양을 하라. 너무 격정적으로 하지 말고 부드럽게 하라.

음악적인 노력과 준비는 회중 앞에 나서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예절과 섬김이다. 동네 노래자랑을 나가도 준비와 연습을 한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으로서 아무 준비도 없으면 되겠는가. 성심 성의껏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음향은 더 중요하다

예배가 뭔가 산만하고 감흥이 없다면 음향이 문제인 경우가 많다.
제대로 된 엔지니어만 있어도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왜 사람들이 대형 집회를 선호하는가? 해답 : 왜 사람들이 집에서 보는 TV에 만족하지 않고 극장에 가는가를 생각해보라.

규모가 크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규모마다 느껴지는 느낌이 다르다. 몇몇이 모여서 오손도손 기타를 치면서도 충분히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큰 규모라도 일렉기타가 유난히 거슬린다던가 마이크의 음질이 좋지 않다던가 하면 예배에 집중하기 힘들다.

규모가 커질 수록 신경써야 할 것이 많아지는데, 어지간히 큰 규모의 교회에서는 좋은 엔지니어를 두기 마련이므로 걱정이 덜하다. 작은 규모에서는 단촐한 악기 구성이기 때문에 신경쓸 것이 없고 불협화음의 문제가 없다. 문제는 중간 규모이다. 이제 드럼과 베이스를 놓고 뭘 해보려는 찰나, 음향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선은 악기가 추가되었다는 감격과 기쁨에 충만할 때, 그런데 연주자는 초보라서 정신없이 박자 맞추기도 버거워할 때, 그 때 너무 기분에만 취하지 말고 음향이 어떤지 냉정하게 살펴보자.

초보 연주자는 기본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기본만 가지고는 정말 어색한 음악이 된다. 음악적 요소만 놓고 본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오르지 않으면 아예 청중석에 앉아 있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음악보다 화합이 중요하고 대중들이 초보의 연주를 감싸줄 수 있는 아량이 있으면 같이 하는 것도 고려해본다. 연주자가 너무 의욕이 넘치면 찬양 인도자로서 뭐라 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찬양 인도자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도 단원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다. 연주자가 너무 자기 흥에 취해 밸런스를 깨고 있다면 진지하게 대화를 해 봐야 한다. 하나됨을 위해 연주자가 좀 부족하더라도 감싸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됨을 위해 연주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음향 밸런스가 완벽하게 갖춰지면 인도자는 별로 할 것이 없다.아무 것도 안 해도 듣기 좋고 따라부르기 좋은 찬양이 된다. 본인이 쓴 글을 참고해도 좋다.




새 찬양은 별로 필요 없다


사실은 아주 필요 없다. 이미 수많은 곡이 다 나와 있고, 충분하다. 찬송가만 해도 500곡이 넘는데, 다 부르려면 세월이다. 새 찬양은 회중이 원할 때만 하는 게 좋다. 새 찬양을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그런 소리가 들리면 당장 그만두라.

새 찬양은 딱 듣자마자 듣기 좋고 따라 부르고 싶고 그래야 한다. 그것도 찬양인도자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그래야 한다. 본인은 듣자 마자 좋았겠지만, 다른 사람도 그런지 고민해보자. 새찬양은 억지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새 찬양을 부른다고 은혜가 더 넘치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다른데 있지, 새 찬양을 못 불러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혹시 회중이 원하는 새찬양이 있으면 거기에 따라가는 정도로 충분하다.



노래 부르기  - 꾸안꾸!


일단 찬양 인도자의 노래 실력은 있으면 엄청 좋다. 그 어떤 화려한 편곡과 악기보다 인도자의 진실된 목소리가 회중의 마음을 움직인다.  찬양 부르는 목소리가 좋으면 청중은 훨씬 쉽게 찬양에 집중하고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없어도 괜찮다. 노래 실력이 형편 없으면 작게 부르거나 안 부르면 된다. 그렇게 하면 되는게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 부르는 것보다 안 부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음 가사만 멘트해서 정확히 인도만 하고 찬양은 하지 마라. 나머지 찬양은 회중이나 코러스에 맡기자. 코러스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해야 되면 규모가 작을 테니 이때는 마이크를 멀찍이 떼고 작게 부른다. 가끔 마이크 없이 기타 하나만 달랑 메고 10명 이상을 인도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내 노래소리는 어차피 하나도 안 들린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이 은혜롭기만 하다.

찬양 인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노래 실력이란? 우선 음정 박자는 정확히 맞춰야 된다. 솔직히 박자를 틀리는 정도면 찬양 인도의 은사는 없는 거 아니냐... 는게 객관적인 생각일 것이지만 하나님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음정 박자는 틀려도 그래도 노래는 잘 한다!"  ?? 그게 노래 잘 하는 거 맞냐? 맞다 쳐도 혼자서 부를 때 감정이나 표현을 잘 한다는 수준일 것이다. 회중 찬양은 다 같이 부르는 찬양이기 때문에 무조건 박자와 음정이 통일되어야 한다.

특히 찬송가의 경우, 악보대로 안 부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악보를 볼 줄 아는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음정 박자를 맞추는 이유는 다같이 통일하여 거부감없이 부르기 위함일 뿐, 어떤 음악적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다. 모두가 '노랑'으로 부르는 데 '파랑' 이 맞다고 우길 필요가 없다. 악보대로 불러야 성령이 임재하시고 틀리게 부른다고 하나님한테 혼나는 거 아니다.

음정 박자를 맞추고 나면 다음은 성량이다. 여기서 성량이란 진짜 목소리의 크기나 호흡보다는 큰 소리라고 느껴지는 음질의 해비한 무게감을 말한다. 특히 저음에서의 성량이 중요하다. 고음의 후렴부는 굳이 찬양인도자가 안 불러도 회중의 목소리로 충분하다. 그러나 저음의 도입부에 인도자의 목소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도자 중에는 이상하게 고음병에 걸려서 찬양이 저음이면 은혜가 안 되고 고음이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저음 부는 키를 높이거나 화음을 넣어서 일부러 높이는 사람이 있는데 이거는 매우 나쁜 습관이다. 이 습관의 첫째 원인은 저음을 잘 못 부르는 자기 목소리다. 헤비한 음색을 굳이 트레이닝하려면 목이 쉴 정도로 노래를 부르고 쉬고를 반복하면 되는데 한 번 변한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으니 신중해야 한다. 두 번째 원인은 찬양인도자인 내가 고조되고 내가 신나게 불러야 회중들도 신날 것이란 착각이다. 내 기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심심한 저음이 이어지더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안정적이고 편안하게 부르면 된다.

화음 넣는 버릇은 진짜 안 좋다. 인도자는 화음 넣는 위치가 절대로 아니다. 우선 이런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 따위는 내려놓고(!) 자신의 기분으로 찬양하려는 버릇이 있는 거 아닌지 돌이켜보자. 화음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음악적인 감흥에만 너무 집중한 것은 아닌지, 과연 우리의 은혜와 성령의 임재하심이란 어떻게 오는 것인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굳이 화음이 들어가야 된다면 코러스에게 맡기자. 코러스가 잘 못한다 하면 그냥 넘어가자.

작곡가가 멜로디를 만들 때는 여러 가능성과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음을 고른 것이 현재의 결과다. 작곡가가 하필 미를 멜로디로 선택한 것은, 도나 솔이 아닌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게 본 멜로디가 아니면 음악적으로 멜로디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본 멜로디가 주는 안정감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자. 모든 찬양 멜로디는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하여 더 추가할 것이 별로 없다. 다 떠나서라도 인도자가 화음을 넣으면 듣는 사람은 헷갈린다. 은혜로운 찬양의 첫 번째는 안정감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이런 저런 신경쓸 일이 많으면 예배에 집중이 안 된다. 인도자가 화음을 넣는 순간, 그 소리가 청중에게 들리면서 신경쓸 일이 늘어나는 것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부르는 사람이 좀 허전하더래도 좀 좀 참자. 그래도 결정적인 순간에 살짝 넣으면 좋을 거라고? 그럴 수도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글쓴이의 취향이라고 해두자. 본인 생각에는 아예 안 넣는게 상책이다. 찬양인도자는 항상 회중을 따라가는게 좋다.

인도자로서, 싱어로서 테크닉은 무조건 도움이 된다. 다만 예배인도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적절하고 절제된, 세련된 테크닉이 필요할 것이다. 몇 가지 적자면, 우선 과한 감정이입은 피한다. 도입부를 너무 잔잔하고 멋있게 처리하거나 후렴이라고 해서 강력한 애드리브를 넣거나 하지 말고 원래 멜로디를 정직하게 안 틀리고 한결같이 잘 부르는게 중요하다. 이게 순전히 글쓴이의 취향인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케바케의 문제가 아니라 정답이 있는 문제이다. 특송이라면 성악톤으로 불러도 되고 마음껏 감정이입을 해도 된다. 그러나 예배 인도를 성악의 창법으로 부른다면 단언컨데 그것은 틀렸다. 자연스럽고 튀지 않는 그러나 아름다운 발성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

미성도 연습해본다. 미성이 뭐냐고? 10m 거리에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 안 들리게끔 조용히 찬양을 해 보면 그 톤이 미성인데 톤은 유지한 채 볼륨만 키워보자. 항상 배에 힘을 주어 부르는 건 동요 부를 때나 하는 것이고, 인도자는 미성도 잘 쓰면 좋다.

그리고 바이브레이션. 대부분의 찬양하는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테크닉인 것 같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감정 표현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없으면 연습해서라도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미 있는 사람은 과하게 쓰지 않도록 하고 바이브레이션 없이 노래부르는 연습도 따로 해둬야 한다. 무조건 습관적으로 넣는 것이 아니라 우선 바이브레이션 없이 노래를 불러본 뒤, 허전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꼭 필요한 부분이 언제인지 고민해야 한다.

쉰 목소리가 나는 탁성은 적절히 쓸 수만 있으면 매우 효과적.. 이긴 한데, 이런 건 너무 전문적인 영역이다.

그 밖에 너무 비음을 섞는다거나 특정 음악적 장르의 느낌이 너무 묻어난다거나 하는 나쁜 습관이 있으면 고치는 게 좋겠다. 하여튼 듣기 부담스럽지 않게 부르는 게 최고 덕목이다.

꾸안꾸! 꾸민 듯 안 꾸민 듯 열심히 노력하되 꾸민 느낌은 안 나도록, 정교하게 부르되 너무 테크니컬하지 않도록 한다. 진심이 느껴지도록, 그러나 틀리지는 않도록.



자신감있게 하라


회중들의 무표정에 기가 눌려 있으면 안 된다. 자신감 있게 그저 하고자 했던 것을 하라. 반성은 다 끝나고 내려와서 한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리더가 당황하면 회중은 더 혼란스럽다.

자신감이 있으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준비가 되면 자신감이 있다. 학교 교실에서 준비가 안 된 선생님을 학생들이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것처럼 준비가 안 된 리더는 바로 눈에 보인다. 자신감을 가지고 리드하면 그 자신감을 회중이 다 본다. 그러면 믿고 따라갈 수 있다.

가장 좋은 준비는 여러 번 불러보는 것이다. 혼자도 여러 번 해보고 다같이서도 여러 번, 혹은 반주자 한 명만 끼고서라도 여러 번 불러본다. 어떤 부분이 은혜가 되는지 먼저 느껴본다. 멘트도 미리 다 적어본다. 준비된 리더가 되자.



콘티 


찬양인도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콘티를 짜는 것이다. 다른 건 누가 참견하고 도와주더라도 콘티는 혼자 짠다. 그만큼 인도자의 영감과 역량이 중요한 부분이다.


콘티는 두 가지를 생각한다, 메시지, 그리고 음악적 분위기.

우선 메시지. 가사는 신경도 안 쓰고 코드만 연결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당연히 내용이 중요한데, 주의할 점이 있다. 너무 청중에게 뭘 주입시키려고 하지 마라. 하고 싶은 말, 이런식으로 은혜받았으면 좋겠다는 당신의 생각, 그걸 너무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복은 적당히, 청중이 원할 때만 하고 피곤하게 하지는 말자.

때로는 신나는 곡들 몇 개를 가사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그냥 묶어서 부를 때도 있는데, 뭐 어떠랴 신나고 좋기만 하다. 일단 신나고 좋다면 그것도 은혜다.

보통 3-4곡을 부를 때, 한 가지 주제에 너무 노골적으로 집착하면 청중에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은근히 연결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다음 음악. 콘티 짜면서 음악적으로 신경쓰는 부분은 빠르기, 그리고 코드 연결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인도자들은 코드 연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냥 살짝 끊고 가도 괜찮다~


보통 20분 정도 찬양을 한다고 하면 4-5곡 정도 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4곡 정도를 좋아한다. 여기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정석적인 예배 감정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

주님의 임재 혹은 우리가 예배로 나아감 혹은 교제와 축복,
감사와 찬양을 드림,
회개와 은혜,
결단과 헌신,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 

이것은 일반적인 기도문의 절차와도 비슷하다. 이 모든 것을 담아도 충분한 찬양 콘티가 된다. 특별한 영감이 없으면 그냥 이 대로 해도 좋은데, 하나님을 영접하는 처음 구절의 의미는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이후 예배 순서로 미루고, 찬양 인도에서는 보통 주님의 은혜를 구하거나 다짐의 고백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예를 들어보겠다.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예수가 좋다오(많은 사람들)
예수 보다 더 좋은 친구 없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 오늘 이 하루도(내게 주어진 하루를 감사합니다)

첫 곡은 교제도 되고 찬양도 되고, 이런 곡이 첫 곡으로 매우 적절하다.
마지막 곡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은 사실 문맥상 뜬금없긴 하다. 그냥 다들 좋아하는 찬양 이라서 그냥 넣었는데 뭐 어떠랴. 다들 그 곡을 부르고 싶어하는 것을. 꼭 하나의 주제로 안 이어저도 괜찮다. 만약 주제를 이어가려면 세번째 곡의 후렴이 헌신과 관련된 것을 포인트로 잡아서 '오늘 이 하루도'와 같은 곡을 넣으면 좋겠다. 하여튼 빠르게 시작해서 느리게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목마른 사슴(D코드)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오직 믿음으로(세상 흔들리고)

역시나 중장년층 콘티. 전체 곡이 하나님의 능력과 나를 보호하심으로 주제가 통일되어 있다. 전부다 똑같은 내용 같지만 그래도 순서가 있다. 첫 곡은 하나님을 찾는다, 마지막은 내가 어떻게 하겠다, 이렇게 구조가 잡혀있다. 모두 느린 곡이고 가사가 좋아서 엉덩이를 흔들며 찬양에 푹 빠지기 좋은 형태.



빛으로 부르신(주님이 우리를) / 두 손들고 찬양합니다.
경배하리 내 온 맘 다해
하늘위에 주님밖에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 온전케 되리
 + 온 맘 다해(주님과 함께 하는)

이것은 약간 젊은 장년, 늙은 청년을 위한 콘티. 전체 곡이 '오직 주님'이라는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첫 곡을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로 하면 너무 노골적으로 헌신을 강조한다. 인위적인 느낌은 은혜에 좋지 않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약간 다른 느낌으로 '빛으로 부르신'이 신나고 더 좋은 것 같다. 마지막 '온 맘 다해' 역시 좋은 곡이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싶다. 기도 한 번 하고 후렴만 부르거나 하는 식으로 더하면 좋을 듯.
조금 더 변화를 주고 싶다면 네 번째 곡에 '온전케 되리'와 같이 살짝 주제를 전환하는 것도 좋다.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렇게 되지 못하는 회개, 혹은 그렇지 못함에도 감싸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연관된다.

요즘은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 십자가의 흘린 피로서, 와 같은 직접적으로 회개를 간구하는 찬양은 잘 안 하는 추세인데, 할 수 있으면 하는게 좋다고 생각하고, 이런 찬양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나는 너무 고지식한 사람인지.

그리고 새로운 찬양을 원한다면 요즘 찬양도 좋지만 옛날 고형원, 혹은 더 내려가서 최용덕, 김석균과 같은 사람들의 곡을 찾는 것도 좋다, 찬송가를 재해석하는게 유행이었듯이, 이들 곡들도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여튼 찬양 콘티를 짤 때는 전체가 하나의 기도로 묶여지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면 좋다. 멘트를 넣을 부분이 어디인지, 가사의 어떤 구절을 강조할 것인지 생각해두어야 한다. 특정한 주제를 넣어도 좋은데, 너무 대놓고 주제를 부각하면 부자연스럽다. 마치 다른 내용인 것 같은 찬양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게 가장 좋은 베스트.



멘트는 간결하게


멘트라는 것은 찬양 콘티만으로 주제를 부각시키기 어려울 때, 또는 흐름을 유도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 멘트도 하지 않는 것이다. 멘트 없이도 그냥 가사로 은혜가 되고 자연스럽게 흐름이 이어는게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데 찬양만으로는 메시지가 부족할 때 인도자가 개입하여 이런 식으로 은혜받으십시오~ 하고 알려주는 게 멘트다.

그런데 뭔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자체가 찬양 인도로서 그렇게 좋은 행위가 아니다. 시켜서 억지로 받는 은혜에는 거부감을 느끼기 떄문이다. 특히 특정 구절을 억지로 반복하는 습관은 매우 안 좋다. 맨 처음 말했던 것을 다시 상기해보자, 찬양 인도자란 회중이 원하는 찬양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원하는 찬양을 부르게 하면 되는 것일 뿐, 찬양인도자는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인도자는 콘티를 고르고, 나머지는 회중에게, 하나님에게 맡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런 생각이 간절히 든다면.. 뭐 어쩌겠나,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할 수는 없으니, 순종하는 마음으로 멘트를 할 수 밖에. 이런 경우는 설교와 찬양이 섞이는 형태로 봐야 한다. 설교는 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게 아니다. 기도와 간절함으로 준비하는 것이며, 내 불순한 생각이 섞이지 않도록 민감해져야 한다. 멘트를 꼭 해야 할 때는 설교에 준하는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책임감과 신중함을 가져야 한다.




평소 삶이 중요하다


학교다닐 때 좋은 선생님 밑에서는 공부가 잘 되는데 재수없는 선생님이 뭘 가르치면 아무것도 안 들어온다. 

찬양인도자는 특히 평소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상처주게 되면 그 사람은 당신이 인도하는 모든 예배를 망치게 된다. 반대로 평소 진실되고 겸손하게 행동하면 당신을 통해서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약간 다른 얘기 같지만.. 교회 다니면서 술 먹고 담배 피워도 되나?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당신에게 술 마시고 담배피는 목사님도 괜찮은지 생각하면 된다. 목사님에게 기대하는 삶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을 그대로 찬양인도자인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보자.

찬양밴드란 것은 음악적으로 잘난 사람들이 무대에 나와서 잘난척을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찬양인도자는 가장 잘난 사람이다. 하지만 절대 그렇게 보여서는 안 된다. 뽐내는 것은 자제하고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요나처럼, 세례요한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회개할 것을 외쳐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하라. 찬양인도할 때만 성도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24시간 섬겨야 한다.



그냥 다 안 중요할 수도..?


같은 콘티로 하는데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다른 분이 짰던 콘티를 급하게 받아서 그냥 한 적도 있는데 그저 곡에서 와닿는 부분만 연결해도 충분히 좋은 예배가 됐다. 그 자리에 모인 성도님과 찬양단의 마음가짐과 진정성만 있다면 하나님은 뭘 어떻게 해도 응답하신다. 때로는 사람의 계획과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루 종일 짜증과 불순한 마음들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 찬양 인도를 하려고 자리에 섰다면? 그날 예배는 나 때문에 망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사용하시는걸까. 찬양인도자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감격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이 아무리 망나니라도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 한, 당신은 반드시 쓰임받게 된다. 스스로의 부족함과 좌절을 느끼는 최후의 최후라도 당신을 사용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회중 탓을 하지 마라


와..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나. 있다. 은혜 받을 생각이 없다는 둥, 맨날 찬송가만 부른다는 둥, 믿음이 없다는 둥, 회중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그래 뭐 사람으로서 불평을 할 수도 있지. 이것은 사실 모든 사역자가 겪는 일인데, 모세도 그랬다. 40년의 광야 생활이 끝날 무렵, 어느날 백성들이 물이 없는 곳으로 왔다고 불평을 했다. 우리를 죽일 셈이냐 하고 모세에게 따졌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다. 40년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수도 없는 기적을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놈의 백성들은 아직도 불평하는가, 모세는 짜증이 났다.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물을 내랴 하면서 바위에 명령하는 대신 지팡이로 쳤더니 그래도 물이 나왔다. 이 불순종으로 그는 끝내 가나안 땅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40년동안 변함이 없는 건 백성 뿐 아니라 모세도 똑같다. 그 역시 그 놈의 성질머리를 못 고쳤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부족한 모세를 통해서도 바위에서 물을 내는 일을 행하신다.

회중이 지각을 해서 찬양시간에 자리가 텅텅 비든지, 혹은 딴짓을 하든 그런 것은 일단 당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에 신경쓰지 말고, 찬양 리더는 사역자로서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잘 하면 된다.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당신은 그저 물을 줄 뿐이다. 딴짓 하는 사람도 있지만 찬양에 푹 빠진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를 섬겨라. 혹은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 앞에서 어찌 교만한 마음으로 누구를 탓하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자의 마음을 잃지 말자. 책임감있게 사역을 완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다.

사단은 자꾸 과거와 현재를 당신 눈 앞에 들이민다. 당장 교회에 모인 사람들과 현실을 보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말씀하시고 꿈을 보여주신다. 항상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하나님을 신뢰하라.

전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혹은 개척교회에서 힘들게 사역해 본 경험이 있는가? 뭘 해도 좋으니까 제발 아무나 앉아만 있어달라고, 어쩔 때는 지나가는 멍멍이라도 그냥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성도 한 분 한 분의 존재가 간절할 때도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을 만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삯꾼은 늑대가 오면 도망치지만 목자는 목숨을 걸고 지킨다. 찬양인도자인 당신도 삯꾼의 마음이 아니라 목자의 마음을 가진다면, 앉아있는 성도 하나 하나가 그렇게 이뻐보이고 귀할 수 없다.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사랑하고, 앞에 서 있는 단원들과 예배드리는 교인과 그 모두를 사랑하기 바란다. 그것이 어쩌면 전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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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할머니 설 차례상


할머니 돌아가시고 처음 지내는 차례이다.

할아버지는 결혼을 두 번 했고 첫번째 할머니로부터 5남매, 두번째 할머니로부터 2형제를 낳았다. 우리 아버지는 그 2형제 중에서 맏이이다.

큰 할머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았고, 할아버지는 우리 할머니와 같이 7남매를 키웠다. 할머니는 7남매 키우느라고 하루종일 일하고 도시락 싸고 죽을 뻔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나랑 같이 술을 마시면서 옛날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때마다 큰 형들 도시락 싸느라고 작은 애들 울고 보채는 거를 매정하게 대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했다.

7남매는 다들 양반이라 이복형제들끼리도 사이좋게 잘 지내는 모양이다. 한 번도 싸운 것을 본 적도 없고 싸웠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 그저 서로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 뿐이다.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큰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할아버지, 큰할머니 제사 지낼 때, 온 친척이 다 모였었다. 그런데 작은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나니 거기 못 낀단다. 참으로 섭섭하여, 키워준 사람 정은 없는가? 우리는 큰할머니 제사때마다 절을 했는데? 그렇게 생각되면서도 우리 작은 할머니가 이복 형제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다정했는지 혹은 매정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쨌거나 그 형제들 마음 아무도 헤아릴 수 없으니 그냥 그렇구나 하는 수 밖에.

할아버지 제사는 저쪽에서 지내준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 제사를 지낼 사람은 두 형제밖에 없다. 그리하여 형제 둘이서 할머니만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됐다.

형제 중에도 맏이가 차례를 지내야 한다면서 작은 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차례 지내자고 했다. 아빠는 어떻게 차려도 상관없느냐? 나는 교회 다니는데 그냥 예배 드려도 상관없느냐? 참고로 작은 아버지는 절 다니는데, 우리보고 상관없단다. 그리하여 아빠는 설 전에 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추도 예배는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물어봤다. 목사님 왈, 추도 예배는 아무것도 안 차리고 예배만 드려도 된다, 그런데 그것은 설을 보내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고, 가장 좋은 것은 가족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래, 그것도 섬김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평생 해본적도 없는 차례상을 차릴 운명에 처하게 됐다.

할아버지와 관련해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할아버지는 말하자면 아주 절실한 유교 신자인데, 어느날 제사상에 피자를 손수 사오셔서 올려두셨다. 피자는 뭐 전이랑 비슷한가? 할아버지 말로는 조상님들도 요즘 머가 나오는지 드셔보면 좋댄다.

그 피를 모두가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일까. 아버지랑 나는 설 전날 저녁부터 밤 12시까지 룰루랄라 전을 부치며 차례상을 준비했다. 아빠는 대애애충~ 머~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밤도 안까고 대애충 슈퍼에서 맛밤을 사왔다. 곶감은 집에서 해놓은게 있어서 근사하게 올렸다. 접시는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일회용 접시를 올렸다. 다행히 할머니댁에 향 피울 제기는 있어서 가져왔다. 그래도 포는 어떻게 사왔네? 아니, 그래도 있을 건 있어야지~ 아빠는 머 대충 한다면서 대충 사왔나보다. 대충 탕도 끓이고 전도 6가지나 부치고 남자 둘이서 할 건 다 했네 그래도.

우리집 제사는 엄숙하지가 않다. 제례를 지내면서도 형제들끼리 농담따먹기를 하면서 낄낄대기 일쑤이다. 작은아버지가 절차가 어떻게 되냐고 나한테 물어본다. 나보고 공부를 하란 것인가? 하여튼 나는, 어째 30년동안 교회 다니던 사람한테 물어봅니까~ 하고 폰을 열어서 대충 검색해본다. 에~~ 인제 여덟번째 사신입니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빠가 냉큼 절을 시작한다. 작은아버지가 멍때리고 보다가 아 이거 같이 하는겨? 그제서야 다같이 두 번 절을 한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감나라 배나라 까르보나라 하는 사람들 참 많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여러 안 좋은 케이스 중에서 가장 안 좋은 경우가 제사상에 참견하는 일이다. 이 개빡치는 말참견은 얼마나 유구한 전통이 있는 말참견이던지, 속담까지 있는 거 아니겠나. 제사는 당연히 지역마다 집안마다 다른 법이다. 형식도 다르거니와 분위기도 다르고 집안 사정도 제각각이다.

제사를 잘 지내야 집안이 잘 된다? 집안이 잘 되면 벌써 제사 안 지내고 해외여행 갔다. 우리 할머니가 우리 잘 되게 해준다고? 아이고 할머니나 잘 지내쇼~ 잘 되려고 제사 지내는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그저 보고 싶은 할머니 죽어서도 잘 모시고 싶은 마음 뿐이지.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했던 말은 추운데 출근 어떻게 햐~ 였다. 거 차 타고 가는데 춥기는~ 온갖 걱정 다 머리에 싸매고 그렇게 가셨다.

덩그러니 사진으로만 남았다는 말, 차례상을 보니까 또 실감이 나서. 할머니 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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