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회를 30년간 다녔고, 당연히 미신은 안 믿는다. 그런데 그 하나 믿던 유일신마저 안 믿고 무신론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미신을 안 믿는 자가 되었는가 말이다.
그런데 사주를 보게 되었다. 재미로. 그리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리고 하필 철학원이 집 가까이 있고. 그리고 나는 사주가 주는 이득을 본능적으로 알고 갔다.
사주는 태어난 년월일시에 의해 자기 운명과 기질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내가 철학을 하면서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나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나가야 할지 끊임없이 싸우고 고민할 동안 사주는 그냥 다 정해준다. 나는 그게 필요했다, 너무 지쳤기 때문에. 외부의 끊임없는 평가,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이 모든 것이 올곧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특히나 부정적 환경에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하고, 나 스스로를 다잡아가는 일이 너무 고되고 힘들 때, 나는 사주를 보러 간 것이다.
사주가 말하길, 나는 불 속성을 네 개나 지니고 있어 어두울수록 쓰임새가 많은데 올해는 밝은 태양이 다가오는 여름의 한복판이라 부정적 평가가 따라오고 모든 분야에서 힘든 시기가 될 수밖에 없다 하였다. 그러나 내년에는 변화의 시기가 찾아옴으로서 새로운 평가와 좋은 일들이 따라온다 하였다.
나는 너무나 간편하게 지금 겪는 스트레스 상황을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격하시키고 차분히 내년을 대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또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발버둥치고 애를 쓸 때, 사주는 그냥 너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간편하게 말해준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조금은 내려놓고 삶의 방향에 대해 좀 더 여유로운 시각을 가지게 만들어준다.
사주가 맞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는 결국 내가 결정한다. 2027년에는 귀인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2027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을 무시할 것이냔 말이다. 결국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내 맘대로 사귀게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불확실함으로 오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여준다는 것이고, 실패도 성공도 간단히 합리화해버린다는 것이다. 그 마법, 나쁘지 않다.
0 comments:
댓글 쓰기